왕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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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지명 유래
6 대기리 유기[劉基:중국 원말명초(元末明初)의 유학자이며 정치가이다. 자는 백온(伯溫). 천문·병법에 능하였으며, 명(明) 태조(太祖)를 도와 중원(中原)을 얻어 성의백(誠意伯)이됨]를 추사(推思)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는데 그 사(祠)를 강선당(講善堂)이라 하고 그 상리(上里)를 소기(小基), 그 하리(下里)를 대기(大基)라 했다.
《嶺東民俗志 : 地名傳說編(1972年刊)》

대기리는 본래 강릉군 구정면 지역으로 큰 터가 있어 한터, 큰터, 대기라 했고, 또 본 리의 점구터를 대장터라고 한데서 마을 이름의 유래을 찾을 수 있다. 1759년 《여지도서》에도 대기리라 기록되어 있다. 효종 때 밀양 박씨가 창설 이후 각 성씨들이 이주해 왔다. 1916년 늪골(樓洞), 늘막골(板幕洞), 도화목이(桃花洞), 마지목이(牛項), 용수골, 작은터(小基洞), 갈밭골, 벌마을(坪村), 곰자리, 닭목이(鷄項), 바람불이, 석동거리(三里洞), 배나드리(船渡里), 다릿골(橋洞), 다리재(橋峙), 제도리(濟渡里), 새물터(間水基), 놀거리, 피늪, 자웃골, 소란, 가락동(佳樂洞), 동초밭, 황철떼기 등을 병합하여 대기리라 하여 상구정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이 원체 넓어서 처음엔 3개리로 되어 있었으나, 근간에 고루포기산 중턱을 개간하여 고냉지 채소를 심는 경작인들이 있어서 마을이 새로 생겨 4리까지 되고 현재 대기리는 고랭지채소 경작인 중심으로 거주해있다.
5 송현리 조선 태조때 송경(松京)을 생각하면서 강릉의 서남쪽을 송현(松峴)이라 하고 동산(東山)은 규학(叫鶴), 남산(南山), 삽당은 서덕(敍德), 북암(北岩)을 선연당, 그 남암(南岩)을 명당(明堂)이라 했다. 이 모든 것은 고려 왕도(王都)였던 송도(松都)를 생각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嶺東民俗志 : 地名傳說編(1972年刊)》

송현리는 본래 구정면 지역으로 소재(솔재) 밑이 되므로 소재, 송현리라 했는데 1916년 화실이(花實洞), 벽석골, 배나무골(梨木洞), 버당말(坪村), 당목골을 합쳐 송현리라 하여 상구정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왕산면에 편입되어 있다. 마을 동쪽으로는 정선군 임계면 임계리, 서쪽으로는 대기리, 남쪽으로는 고단리, 북쪽으로는 목계리와 접해있다. 고려 황도였던 송도를 생각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4 고단리 강릉에 와 있던 고려시대 충열지사 고상단충(高尙丹忠)을 생각하여 이곳 지명을 고단(高丹)이라 했다. 《嶺東民俗志 : 地名傳說編(1972年刊)》

고단리라 칭한 것은 조선시대에 保安道에 딸린 高丹驛이 있어서 고단이라 하였는데, 1916년 한늪이(大淵洞), 샛골(間谷洞), 다릿골(橋洞), 사반동(沙盤洞)을 합쳐 고단리라 하여 상구정면에 편입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고단역은 府 서쪽 60리에 있다”고 하여 ‘高端’을 ‘高丹’으로 적었다. 고단은 높은 곳에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마을 가운데는 삽당령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물이 거리고단에서 합류하여 정선군 임계면으로 흐르는 고단천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충신 高尙丹忠을 기려 고단리라 했다 한다. 또 다른 일설은 조선시대 南師古의 비결에 왕이 발왕산에서 출발하여 고단에 궁궐을 짓는다 하여 궁중의 색깔인 붉을“丹”을 쓴다고 한다. 마을은 동쪽으로는 정선군 임계면, 서쪽으로는 대기리, 정성군 북면, 남쪽으로는 정선군 임계면, 북쪽으로는 송현리, 대기리와 접해있다.
3 왕산리 대관령 밑에 있는데 이종(理宗)을 추봉해서 단(壇)을 세우고 여기에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 산을 이름해서 대제(大帝:왕산)라 했다.《嶺東民俗志 : 地名傳說編(1972年刊)》

마을은 원래 강릉군 구정면 지역으로 1916년에 곰자리(熊宿洞), 쑥밭버덩(蓬田坪), 입내골(立來谷), 제리니(紫蓮洞), 장재벌(長者坪), 큰골(大谷)과 성산면 오봉리 일부를 병합하여 왕산리라 하여 상구정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은 대관령 산정 동남쪽으로 우뚝 솟은 제왕산이 있어서 왕성한 산줄기가 뻗어있다는 뜻에서 왕산리라 했고, 제왕산 밑에는 제왕산성이 있다. 제왕산성은 고려말 우왕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마을은 동쪽으로는 도마리, 서쪽으로는 도암면 횡계리, 남쪽으로는 대기리, 북쪽으로는 성산면 어흘리, 성산면 오봉리와 일부 접해 있다.
2 목계리 목계리는 조선시대 평릉도(平陵道)에 딸린 목계역이 있었으며, 모계 또는 모개라 했다 전하며 사기점, 방터골, 구와동, 기수무늬, 낭골(仙人堂)을 합쳐 1916년 상구정면에 편입되었다. 옛날에는 모계(茅溪)라고 하다 목계(木界)로 개칭되었고, 삽당령을 기준으로 송현리와 경계를 이루고 마을 동쪽으로는 북동리, 언별리, 서쪽으로는 대기리,남쪽으로는 송현리, 동남쪽으로는 정선군과 접해 있다.
1 도마리 도마리는 1916년 밭갈이, 새재, 옷(옻)밭골, 둔지말, 탑거리, 돌모렝, 연애골을 합하여 도마리로 불리(우)게 되었다. 도마리는 복숭아와 매화(梅花)가 많다고 하여 도매리(桃梅里)라 하였으나 고려말 우왕이 이곳 큰골에서 은거하실 때 나무[林]가 삼[麻]처럼 우거진 곳에 도읍 하였다 하여 ‘都麻’라는 설과, 마을 형국이 부엌에서 쓰는 ‘도마’ 와같아 도마로 차음(借音)했다는 설로, 도마와 고기는 상극이므로 魚씨가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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