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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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지명 유래
10 죽 일(竹谷, 梧谷, 竹梧) 땅재봉 동쪽 난맥에 있는 마을로 홍제동, 교동, 유천동 경계지역이다. 죽일은 중국 晋나라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놀던 곳과 비슷하고, 또 대나무와 오동나무가 많이 자라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이 마을의 이름이 순수한 우리말로 되어있는 것으로 봐 한자어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마을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옛 땅이름에 "○일, ○실, ○밀"로 된 말은 고구려 지명 소의 "忽"과 같은 뜻인데 이는 "고을"을 나타내는 말이다.
옛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의 지형이 여자의 성기처럼 되어 있어 소문혈 형상이라 불려왔으며, 이 소문혈 형상 앞에 남자의 성기에 해당되는 역두산(力頭山)이 있어, 사람들이 이곳을 쑤시면 역두산이 힘을 쓰게 돼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나서 음란한 행동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역두산에 올라가지 못하게 한다는 지형형 육담이 전해내려 온다.
용지각에서 나온 용이 이 마을에 와서 죽고, 메두에 가서 묘를 썼다는 얘기가 전하는 마을이다.
9 땅재봉(堂山峰, 堂峰) 느릅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제일 높은 봉으로 江陵 四柱山 또는 鏡浦 四柱山의 하나, 회암영당의 堂山이라하여 堂山峰이라 하는데 옛날 이봉 꼭대기에 당을 지어놓고 당제사를 지냈다.
동해 바다에서 대관령쪽을 바라보면 대관령 줄기를 제외하고 江陵四柱山(태장봉, 모산봉, 월대산, 땅재봉)이 제일 잘보인다. 봉 서남쪽 난맥에 돌(바둑바위)이 있는데, 이 돌에 선비들이 바둑판을 그려놓고 바둑을 두었으며, 바둑바위 동쪽으로 약 50m 지점에는 옛날에 신선이 바둑을 두었던 자리가 있다.
8 유천동(楡川洞) 유천동은 본래 강릉군 정동면 지역으로 1914년 竹梧里를 병합하여 유천리라 하다가 1955년 9월 1일에 강릉시에 편입되었다.
유천은 크게 상유천(윗느릅내)과 하유천(아랫느릅내)으로 나누는데 상유천은 땅재봉을 중심으로 서쪽 마을이고, 하유천은 북동쪽 마을이 된다.
마을 가운데로는 성산면 위촌리 골아우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가 지변 저수지에서 앞내를 형성하여 경포쪽으로 빠지는데 마을로 흐르는 냇가에 느릅나무가 많이 있어 "느릅내"라 한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강릉 四柱山의 하나인 땅재봉(堂山峰)이 있고, 봉남서쪽 난맥에 회암영당(晦庵影堂), 봉 동쪽 죽일에는 공덕사(恭德祠)가 있다. 마을 동쪽에는 교동, 서쪽은 성산면 송암리, 위촌리, 남쪽은 홍제동, 교동, 북쪽은 죽헌동과 접해있으며 자연부락이 7개이다.
7 날밀(蘭谷) 오죽헌에서 선교장으로 가면서 난곡교 다리를 건너 왼쪽에 있는 큰 마을로 경포동주민센터가 있는 마을, 따뜻한 남향받이 마을인데 마을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끊어질 듯 하면서 다시 이어져 마치 난초 잎처럼 생겼다.
또 난곡이란 이태조때 호수근방에 누정을 짓고 덕비(德妃)를 추모하여 그 정자명을 난옥(蘭玉)이라하고 지명을 난곡이라 했다.
6 서지(西池, 鼠, 蕙) 경포동주민센터 앞쪽 골에 있는 마을로 날밀에서 시루봉으로 올라가면서 나타나는 마을이며, 경포호 서쪽에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서지는 쥐가 메내는 형국(쥐가 흙을 파는 형국)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이 마을엔 昌寧曺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5 된봉(高峰,천제봉) 행정말 북쪽 시루봉 뒤에 봉(107m)으로 봉(峰)을 오르기가 힘이 든다고 하는데, “된”은 뒤(後)의 방언 "되”의 뜻으로 "마을 뒤에 있는 "봉"이란 뜻이다. 이곳에서 즈므, 한밭, 날밀, 운정동 4개 부락 사람들이 모여 풍년을 기원하고 재앙을 방지하기 위해 일년에 한번씩 천제를 지낸다.
산정상에 제단을 쌓아놓고, 3월 中丁日(음력)에 유사가 제물을 차려 새벽(子時)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4 난곡동(蘭谷洞) 난곡동은 원래 강릉군 정동면에 딸린 지역으로 날밀, 난곡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杏亭里와 합하여 蘭谷里라 했으며, 1955년에 강릉시에 편입되어 난곡동이라 했다.
난곡동은 날밀, 서지, 행정말 등 3개의 자연부락이 있고 자연부락마다 서낭이 있다.
마을 뒤에는 天祭峰(된봉)이 있고 강릉최씨(崔必達)의 사당인 황산사(篁山祠, 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가 있다.
천제봉 꼭대기에 있는 천제단에서 천제를 지냈고, 또 마을에 가뭄이 들면 기우제도 지냈다.
3 해운정(海雲亭) 조선중종 25년(1530년) 어촌 심언광(漁村 沈彦光)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에 정자를 짓고 살았다하여 해운정 또는 운정리(雲亭里)라 불리웠으며 1963. 1. 21.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해운정은 정면 3칸, 측면2칸 단층 팔작지붕으로 3단 쌓은 축대 위에 남향을 하고 세웠으며 내부는 우측4칸으로 대청마루로 하고 나머지 좌측1칸은 온돌방으로 하였다. 해운정의 현액은 송시열의 글씨이며 가문은 권지웅이 지었고 율곡을 비롯한 여러 명사들의 시문판이 보관되어 있다.
2 배다리(船橋) 선교장 앞 활래정이 있는 그 일대, 옛날 경포호의 물이 앞까지 들어 차서 강문이나 초당에서 죽헌으로 가자면, 배를 타고 와서 이곳에서 내렸다. 즉, 배가 닿는 곳에 다리가 있었다고 하여 동네 이름이 배다리가 되었다.
선교장터는 강릉의 팔명당(八名堂)가운데 하나로 현 통천집이 살기 전에 창녕(昌寧) 조씨(曺氏)가 살았고, 그 전에는 강릉 박씨(江陵朴氏)가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 조선중기 양반집 가옥이 있었는데, 서기1700년 초엽에 이내번(李乃蕃)이란 분이 짓고 그의 손자 이후란 분이 순조15년(서기1815년) 열화당(悅話堂)을 지었다. 주위에는 활래정, 선교장 참소리축음기·에디슨과학박물관이 있다.
1 운정동(雲亭洞) 운정동은 원래 강릉군 정동면(丁東面)에 딸린 지역으로 1913년에 선교리(船橋里)를 병합하여 운정리(雲亭里)라 하다가 1955년에 경포면이 강릉시에 편입될 때 난곡동(蘭谷洞)과 합쳐 행정동을 이루었다.
경포면이 정동면이였을 당시 유천리(상리), 대전리(중리), 조산리(하리)등 3개리가 있었으나, 일제때 하남면(河南面)을 없애고 하남면을 반으로갈라 저동리, 안현리는 정동면에 편입시키고, 산대월리, 방동리는 사천면에 편입시켰다. 그후 조산리는 없애고 운정리를 만들었다.
조선 중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漁村 沈彦光이란 분이 이곳에 정자(海雲亭)를 짓고(중종 25년 서기 1530년)살아서, 그후로 운정리라 했다.
마을 앞에는 경포호가 있고, 성산면 위촌리 골아우에서 발원한 앞내와 성산면 송암리 미리재에서 발원한 뒷내가 마을 앞에서 합쳐 경포호로 들어갔다.(지금은 수로를 막아 물이 바로 초당으로해서 강문으로 흐른다.)
운정동의 면적은 약 3.73km2이고, 시 중 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으로는 포남동, 서쪽으로는 죽헌동, 남쪽으로는 교동, 북쪽으로는 저동과 접해있고, 자연부락은 7개이며, 마을에는 조선중기 양반가옥인 船橋莊(중요민속자료 5호)과 海雲亭(보물 제183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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