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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11.04,
조회수 288
제목 | 강릉 학생 독립운동 : 신문보도 3건_강릉 유지들의 무산아동 교육 후원_崔燉昇, 崔準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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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함문숙 |
내용 |
강릉 학생 독립운동 : 신문보도 3건_강릉 유지들의 무산아동 교육 후원_崔燉昇, 崔準集
◆ 강릉 지역 유지들의 교육 후원 활동 ******************************************************** 1. 동아일보19301104_무산아동 교육 삼락학원 개교, 金溶濟(여) 2. 동아일보19341017_강릉 삼락학원 후원회 조직_崔燉昇, 崔準集 3. 동아일보19350101_강릉 삼락학원 교사 신축비 부담_崔燉昇, 崔準集 ********************************************************* 1. 동아일보19301104_무산아동 교육 삼락학원 개교, 金溶濟(여) ------------------- 삼락학원(三樂學院) 교사를 신축 金溶濟씨의 열성으로 ------------------- (강릉) 강릉군 강동면 옥천정에 근거를 둔 삼락학원은 김용제(여)씨의 열성으로 배움에 굶주린 무산아동을 위하여 4~5간(間)에 불과한 남의 집을 빌려 춘풍추우 四季 성상을 많은 파란곡절 가운데 견디었다. 금년 5월(1930년 5월)부터 김용제씨의 부단한 노력으로 다수의 동정금을 얻어 강릉군 강릉면 용강정에 있는 과거 지방 유지의 소유이던 구락부를 빌리고 3~4백원의 비용을 들여 전부 수선하여 지난 10월 27일(1930년 10월 27일)부터 개교하였다. 2. 동아일보19341017_강릉 삼락학원 후원회 조직_崔燉昇, 崔準集 ------------------------------ 비운의 삼락학원에 7천원 거출을 결의 새 간부들은 당장에 천원씩 거출 강원 사회(단체) 총동원 활약 ------------------------------ (강릉) 강릉읍 林町에 있는 삼락학원(三樂學院)은 7년 동안의 역사를 가지고 수백의 무산 아동을 양육하여 오고 있다. 최근에 경영난으로 폐쇄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지방 유지들이 분기하여 지난 8월에 삼락학원 후원회를 조직하고 재원 조성과 사립보통학교 승격을 기성 하기로 하였다고 이미 보도하였다. 동 후원회에서는 지난 12일(1934년 10월 12일) 오후 4시부터 삼락학원 내에서 위원회를 개최하고 경영유지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토의하였다. 그 결과 학원의 승격을 전제로 종래의 설립자와 원장을 변경하여 유력자 최돈승(崔燉昇)씨로 개선하고 후원회 위원장은 최준집(崔準集)씨로 선정함과 동시에 기본재산 조성에 대하여는 7천원이 되었다. 정통적인 학원으로 장래가 매우 유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3. 동아일보19350101_강릉 삼락학원 교사 신축비 부담_崔燉昇, 崔準集 ------------------------- 삼락학원 기초 공고(鞏固, 단단하게)하다 ◇ 양 崔씨 경비부담으로 금년도 원사(院舍) 신축 ------------------------- (강릉) 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강릉 삼락학원은 경영난에 빠져서 폐문할 지경에 이르렀다. 강릉의 유지인 인사들이 총동원되어 삼락학원 후원회를 조직하고 재단 확립과 사립학교 승격시키려고 활동한다고 보도한 바가 있다. 동 학원의 원장과 학생감으로 새로 선임된 유력자 최돈승, 최준집 두 사람은 일금 천원씩을 하사하였고 부족한 경비까지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교사도 원래 강릉구락부 회관을 빌려서 사용해 왔고, 校舍가 협소하여 큰 불편을 느껴온 형편이므로 금년도에 기어이 신축할 계획이라고 한다. 부지 문제에 대하여도 두 崔씨 가운데서 제공하기로 결정되었다. 삼락학원의 장래 문제는 두분의 손에서 크게 발전되기를 바라고 있다. (해석) 일제의 차별과 핍박을 받으며 먹고살기 힘들어 1919년 만주로 이주한 동포는 34만명에 이르렀고,(※ 고구려 영토, 만주 이주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필요하다.) 1925년 12월에 양양에서 12가구가 만주로 유랑을 떠났다.(신한민보19251210) 1930년 강릉도 가난에 굶주리고 있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1930년 5월 김용제(여)는 부단한 노력으로 무산아동 구제를 위해 강릉 유지들에게 후원금을 모으고 있었다. 1930년 10월 27일에 용강정에 있는 과거 강릉 유지의 소유이던 구락부를 빌리고, 3~4백원의 후원금으로 전부 수선하여 무산아동 교육을 위한 삼락학원을 개교하였다. 1934년 삼락학원(三樂學院)은 임정에서 7년차 역사를 가지고 수백의 무산아동을 양육하여 오고 있었다. 같은 해에 경영난으로 삼락학원이 폐쇄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강릉 유지들이 분기하여(적극적으로 앞장서서) 1934년 8월에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재원을 조성하여 사립보통학교로 승격하기로 하였다. 최돈승, 최준집 두 사람은 일금 천원씩을 후원하고, 강릉의 유지들이 후원한 기본재산 7천원으로 삼락학원이 발전될 것이라고 한다. 1930년 전후부터 1936년까지 강릉농업학교 맹휴와 강릉 비밀결사에 관계된 청년 100명은 강릉경찰서, 서대문형무소, 함흥형무소에서 被檢과 訊問, 폭행, 고문을 동반한 취조가 1년~3년 이상 지속되고 있었다.(※ 동아일보19350907 옥고 3년에 창백한 안색, 최선규 등 9명 강릉그룹 종심) 가계를 책임져야 할 장성한 아들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인 비밀결사 청년들은 집안을 돌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피검 되거나 홀로 만주로 망명한 독립지사의 가족과 자녀들도 강릉에서 굶주리고 있었다. 1934년 최돈승과 최준집 등 강릉의 유지들은 굶주림에 있는 아동의 교육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일제는 강릉 유지들에게서 전쟁후원금을 강제로 각출하였고, 광복 후 친일반민족진상위원회는 이들에게 친일파의 오명을 덧씌웠다. 반면에 강릉농업학교 비밀결사 밀고자 최○○은 기록되지 않고 혜택을 받았다.(부산일보19330628 맹휴 학생, 배신자에게 강력을 가하여 유혈의 참상) 강릉최씨 종중은 강릉에서 굶주림에 처한 무산아동 교육 기관인 삼락학원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최돈승을 버렸을까? ※ 전국으로 다니며 독립의 열망을 피를 토하듯 외치던 최남선 선생의 역사 강연회도 지워지고, 천도교(수운회관, 조계사 옆 건물)에서도, 3.1 독립선언서를 교정하고 인쇄하던 최남선의 출판사(※ 신문관 : 現 서울 종로 조계사 터라는 설)도 최남선을 지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