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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문화/체육 강릉의 역사인물 역사인물 율곡 이이

율곡 이이

율곡 이이
율곡 이이
율곡 이이
  • 본관덕수(德水)
  •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 활동분야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 주요저서성리설,성학집요,격몽요결
  • 출생년도1536년
  • 사망년도1584년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淑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이름은 이(珥), 본관은 덕수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아버지는 이원수로 찰방과 사헌부감찰을 지냈으며, 후에는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율곡은 외가인 강릉 북평촌(현재의 오죽헌)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명종 3년(1548) 13세때 진사초시에 합격하여 그의 총명함을 세상에 떨쳤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였으며, 3년상을 마친 이듬해인 19세때 금강산에 입산하여 선문의 스님들과 교류하면서 불서를 탐독하였다.

23세때에는 영남사림의 거두인 퇴계 이황을 방문하여 학문적인 교류를 하였는데 이후 퇴계는 율곡에 대하여 <군자와 같은 뛰어난 재주로 어린시절에 정도를 일으키니 후일에 성치하는 바를 무엇으로 헤아릴까?>라고 하여 그의 앞날이 번창할 것임을 예견하였다.

명종 19년(1564)에는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으로 칭송받았다.

급제한 후 사가독서를 받았으며,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예조좌랑, 정언, 이조좌랑, 지평등을 역임하였다.

선조1년(1568)에 천추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또한 부교리로 춘추관기사관을 역임하면서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사직하였으나 1571년 청주목사로 부임하였고, 다음해 다시 사직하고 해주로 낙향하였다.

다시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하였다.

다음해 우부승지, 병조참지, 대사간을 지낸 후 병으로 사퇴하였다.

그 후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몰두하다가 1581년 다시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직하다가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예문관과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이듬해 이,형,병조판서와 우참찬을 역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 판돈령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얻어 선조 17년(1584) 정원 16일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율곡 저서

그는 이조판서에 재직하면서 동서분당을 조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또한 이황과의 교류 이후 그와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근본사상으로 하는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민생문제에 대해서도 대동법과 사창제의 시행을 주장하였으며, 성리학적 향촌통치질서의 확립을 위한 해주향약의 실시에 깊이 관여하였다.

한편 글씨와 그림에도 재주가 뛰어났는데, 글씨는 조자앙의 체를 습득하였다.

사망 후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선조의 묘정에도 배향되었다.

그리고 강릉시 강동면에 위치한 송담서원을 비롯하여 파주의 자운서원, 풍덕의 귀암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황주의 백록동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성우계와 성리학에 관해 논제를 주고 받은 <성리설>을 비롯하여 <성학집요><격몽요결><소학집주개본><중용토석><경연일기> 등과 선조2년(1569)에 올린 <동호문답> 선조7년(1575)에 상소한 <만언봉사><인심도심도설><시무육조> 등을 한데 모은 <율곡전서> 38권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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