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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11.25, 조회수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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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릉 학생 독립운동 : 부산일보19331215_강릉경찰서장 후카이(深井)의 사상선도 강연, 주문진 청년 교화
작성자 함문숙
내용 강릉 학생 독립운동 : 부산일보19331215_강릉경찰서장 후카이(深井)의 사상선도 강연, 주문진 청년 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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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 사상선도를 위하여 강릉경찰서에서 총동원
강릉경찰서장이 앞장서서 순회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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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강릉경찰서에서는 최근의 시국을 고려하여 경찰서장 이하가 총동원하여 사상선도에 힘쓰고 있다. 우선 실행 방법으로 지난 6일(1933년 12월 6일)부터 후카이(深井) 서장이 몸소 앞장서서 주문진으로부터 교항리, 연곡, 사천 등 3개 面에 이르러 청년을 중심으로 한 보통학교 생도와 졸업생 등에 대해 사상문제에 관하여 순회 강연을 하며 각지에서 대성공을 얻었고 9일(1933년 12월 9일) 저녁에 귀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번에 각 지역의 청년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가 일본 국민이 된 것을 자랑스럽고, 감사해야 할 근거로 강연을 하였으며 각지에서도 상당한 반향이 있었다고 한다. 특별히 이번 검속(1932~1933년 강릉 비밀결사 청년들이 대거 검거되었던 것)에 대하여 일반인에게 의견을 들어보니 무엇보다 인정을 받아 감사하다고 전하였다. 사천에서도 먹물을 갈아 염색한 듯한(검정색으로 단정하게 한) 복장까지 언급하였다.
강연회가 끝난 후 뜻을 같이한 청년 단장이기도 한 사와무라(澤村) 교장이 오늘 경찰서장의 훈시와 같이 여러분은 전부 단정하게 頭髮을 자르라고 하여 17명의 청년이 그 자리에서 두발 정리를 하였다.

교항리와 같이 각 마을의 振興會員, 區長, 面議 등이 주도하여 일반인의 뜻을 모아 간담회를 열고, 사상문제에 대한 장래의 대책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교항리는 面長 이하 각 공직자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열심히 대책을 강구하고 있어서 종종 유익한 의견도 나왔으나, 결국 面長과 주재소의 主席이 주가 되어 실행 방법을 결정하기로 하고 일반 청년들은 무조건으로 이들의 의견에 따르기로 뜻을 모았다.
면장이 오늘 다시 와주기를 간청함으로 인하여 오셨으니, 어쨌든 이전과 마찬가지로 기대가 많다고 하였다.



(해석)
1933년 12월 강릉경찰서장 후카이(深井)는 주문진에서부터 교항리, 연곡, 사천 등 3개 면에서 강릉 청년들의 사상 교화를 시작하였다.

1933년 전후의 주문진은 다음과 같이 독립운동과 관련 사건인 야학, 농우회, 농조와 노조 시위, 격문, 강릉농업학교 맹휴 등의 발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경성 서대문경찰서의 李 부장 이하 3명의 경관이 1933년 10월 18일부터 돌연 강원도 강릉에 출장하여 수색과 검거에 대활동 중이었고 최호섭과 김상열 2명을 비롯하여 강릉농업학교 학생 20여명을 검거하였고(동아일보19331023) 학생들은 강릉경찰서 유치장에 수용되어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다.

강릉경찰서장에게는 주문진을 비롯한 강릉 청년들의 모종 비밀결사가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후카이(深井) 경찰서장의 훈시는 강릉 청년들에게 같은 일본 국민으로서 지시에 잘 따르도록 교화하는 내용이었으며, 옷도 단정히 하고 머리도 짧게 자르자고 선동하여, 사와무라(澤村) 교장의 호응으로 그 자리에 있던 청년 17명도 시범적으로 머리를 잘랐다.

주문진의 振興會員, 區長, 面議 등이 여러 차례 모여서 사상 교화를 위한 대책을 매우 열심히 강구 하였으나 결국에는 面長과 주재소의 主席이 일제가 지시하는 대로 실행토록 결정하고 청년들은 무조건으로 이들의 의견에 따르도록 하였다.

1933년 일제의 사상선도와 압박, 수시로 피검되어 취조받는 일이 반복되고, 불온 분자로 지목되어 항상 감시를 당하였어도 강릉의 독립운동은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 1932~1933년 강릉 비밀결사 관련 사건들

◆ 1931년 11월경 강릉 구정면 여찬리에 농민야학 개설, 金天會 외에 여러명의 교사, 40여명의 학동 참여(동아일보19311116)
◆ 1932년 1월 4일에 300여 농민이 강릉 장날 시장세가 비싸다며 薪炭(신탄 : 땔나무) 장사들이 시위(동아일보19320115), 나무장사 시위자 200여명 피검(조선중앙일보19350824)
◆ 1932년 1월 강현면 장산리 농민 야학생 격문이 단서로 격문이 게시된 면사무소 14개 간판 철거와 야학교사 및 학생 6명 검거(동아일보19320919)
◆ 동아일보19320507, 강릉 메이데이 격문 사건, 강덕선
◆ 동아일보19320730, 최선규, 최돈근, 이두호, 신흥농우회 사건, 양양농조 사건 관련
1932년 7월 23일 주문진 주재소에서는 돌연 강릉 신리면 교항리에 있는 新興農友會를 중심으로 농우회 회원들의 가택을 일일이 수색하는 한편 崔善珪, 崔燉根, 李柱鎬 외 10여명의 농민 검거
◆ 매일신보19320919, 양양 농민조합 습격 300여명 검거
◆ 중앙일보19330123, 강릉경찰서 남녀 3명 검거, 정인화, 최은순, 김계정
◆ 1933년 5월 1일 강릉 메이데이 격문 관련 청년 6명 검속(동아일보19330507), 사천 주재소 부근 격문 살포, “농민 제군에게 일본제국주의 ××는 ××××에 대한 허울 좋은 ××××으로 여지없이 ××한다.”(조선중앙일보19330508), 관련자 최종렬, 최종대, 최은구 판결(조선중앙일보19330804)
◆ 1933년 6월 22일 오후 2시 일본인 교유가 학생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고 음주에 빠져 학생들을 구타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여 강릉농업학교 150여명의 전 생도가 일시에 교장실에 들이닥쳐 학교측에 그 교유가 사임하도록 압박(부산일보19330627)
◆ 1933년 6월 24일 2명(최○○, 고○○)의 배신자가 강릉농업학교 비밀결사 누설(부산일보19330628)
◆ 1933년 6월 25일 강릉농업학교 교장이 3학년 8명, 2학년 6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조선중앙일보103307004)
◆ 1933년 6월 28일 강릉농업학교 강릉읍 사무소에 모여 학생들의 맹휴에 대해 협의(조선중앙일보19330704)
◆ 1933년 8월 31일 강릉군 사천면에서 발생한 메이데이 격문 사건에 대한 강릉지방법원 판결, 崔鐘烈 징역 8개월, 崔乘大, 崔殷洵 징역 6개월(3년간 집행유예)(조선중앙일보19330804)
◆ 1933년 10월 19일 서대문경찰서에서 파견된 李 형사부장이 3명의 형사를 대동하고 강릉경찰서의 지원을 받아 강릉농업학교를 습격하여 생도 수명 검거, 양양에서 崔浩燮 등 강릉 청년 20명 검거(조선중앙일보10331022, 동아일보19331023)
◆ 강릉농업학교 奉天 秘密結社 ○○단 30명 서대문형무소 수감(동아일보19331021, 신한민보19331130), 경고특비 제2100호
◆ 조선중앙일보19331024, 강릉 주문진 주재소 사건, 朴炳天 강릉농교 퇴학생 압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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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0여년 간 수많은 강릉의 독립지사들이 무명으로 사라져갔다.
강릉의 산하, 골목마다 강릉의 소년들이 독립을 위한 밀의를 다지던 장소였다.
강릉에서 나고 자라 강릉에 거주하며 결사적으로 조국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던
그 동지들은 강릉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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