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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06.27, 조회수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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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릉 학생 독립운동 : 조선중앙일보 19330704
작성자 함문숙
내용 강릉 학생 독립운동 : 조선중앙일보 193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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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농교 맹휴는 해결될 서광 묘연
14명 정학 처분으로 재분규
문제는 거익 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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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강릉농업학교 맹휴 사건은 날이 갈수록 더욱 험악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등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의연 양방의 태도가 강경한 현상이다. 이번 맹휴가 돌발하게 된 전모를 들어보건대 처음 3학년생 40명 일동은 담임인 “모 선생의 비교육적 행동에 대하여 11개 조”를 열거하여 학교 당국에 제출하였다,
등교는 하면서 교수만은 받지 않겠다는 “저항주의 맹휴”를 계속하여 오던 중 지난 21일(1933년 6월 21일) 2학년 10여 명이 3학년과 합류하여 사태는 더욱 확대되어 갔다.
학교 당국에서는 22일로 전 생도측에 원만한 해결을 회답하기로 하였으나, 학교 당국의 태도가 애매 하므로 이것을 관망하여 오던 1학년생까지 2, 3학년과 합류하여 사태는 전교에 파급하게 되었다.
“경찰의 경계는 더욱 엄중하여 학생측의 신변과 행동을 일일이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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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학 처분 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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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학교측으로부터 통지를 받은 학부형 측에서 만반의 알선을 한 결과 24일에 배척하는 선생 외에 교수를 받기로 하고 당일 1시간 수업을 하였는데, 학교 당국에서는 25일에 이르러 돌연 3학년 8명, 2학년 6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발표하게 되자 생도측에서 아연 긴장하여 밀의를 거듭하더니 다시

1. x 선생 절대 배척
1. 무기정학 처분 해제 요구
1. x x 간섭 절대 x x

이상 3개 조항을 제출하고 끝까지 항쟁을 계속하겠다는 결의를 하였다.
문제는 다시 악화되어 가는 현상이라 하며 정학을 당한 학생의 씨명은 다음과 같다.


정학된 학생

3학년 최호섭, 김천회, 김연도, 이동언, 김재근, 전치배, 김동하, 김성호
2학년 최철규, 신국선, 이원명, 김창수, 이종석, 염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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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생은 등교, 2,3년생은 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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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해결이 묘연하던 강릉농업학교 맹휴 사건은 학교 당국에서 생도측의 반성을 촉진하고자 지난 26일(1933년 6월 26일)에 반성서를 제출하도록 각각 통지하였다.
1학년 만이 일제히 반성서를 제출하는 동시에 27일부터 등교하여 수업을 받고 있으나 2, 3학년은 다수 이상이 이에 불복하고 있어 의연히 수업을 받지 않고 항쟁을 계속하고 있으므로 아직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현상인데, 학교 당국은 벌써 최후의 처단을 결정하고 다수 (학생들의) 퇴학 처분을 하기로 내정한 모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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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형회에서 해결책 강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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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의연 분규를 계속하고 있는 강릉농업학교 맹휴 사건에 대한 대책을 강구 하고자 지난 28일(1933년 6월 28일) 강릉읍에 거주하는 학부형회를 읍사무소 2층에서 오후 3시경부터 개최하고 협의한 결과 (학)부형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학교 당국에 사과를 시켜서 등교케 하여 문제 해결에 노력하기로 하였다.
학교 당국에 대하여도 처벌행위는 이 이상 더 나아가지 말기를 요망할 것을 결의를 다졌다.




(해석)
강릉농업학교 학부모들은 1933년 6월 28일에 강릉읍 사무소에 모여 학생들의 맹휴에 대해 진지하게 협의하고 있었다.
일본인 교유가 학생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고 음주에 빠져 학생들을 구타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여 6월 22일 오후 2시에 150여명의 전 생도가 일시에 교장실에 들이닥쳐 학교측에 그 교유가 사임하도록 압박하는 일이 있었다.(부산일보 1933년 6월 27일자)
또한 2명(최○○, 고○○)의 배신자가 비밀을 누설하여, 6월 24일에 강릉농업학교 교실 내에서 학생들로부터 중상을 입을 정도로 유혈을 흘린 상황이 발생한 후였다.(부산일보 1933년 6월 28일자)
학교 당국에서는 6월 25일에 3학년 8명, 2학년 6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발표하였다.
3년 전인 1930년 7월 16일에도 학부모들은 70여명이 금정 예배당 부속실에서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회의를 한 적이 있다.(매일신보 1930년 7월 31일자)

강릉농업학교에는 사복 입은 경찰들이 파견되어 ”경계를 엄중히 하며 학생들의 행동을 일일이 주시”하고 있었다. 2명의 배신자들의 밀고도 있었기 때문에 중대한 사태로 확대되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끝까지 (반제)항쟁을 하겠다고 결의를 다지고 있어서 조선중앙일보 기자는 “저항주의 맹휴”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중국 봉천에 가서 ○○단이 되어 국내로 잠입한 강릉농업학교 선생과 학생 30여명의 비밀결사 활동도 활발하던 시기였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모 선생의 비교육적 행동에 관한 11개 조항이라고 한다. 신문에 보도된 것은 3개 조항뿐이다. 나머지 8개 조항은 일본인 선생의 폭언과 폭행, 민족 탄압에 관한 내용으로 추측된다. 사건의 전말과 미기록된 8개 조항은 강릉경찰서 보고서나 사건 조서에 기록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문은 학내 문제로 맹휴가 진행되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강릉 청년들의 단호하고 용감하였던 독립운동을 강릉은 기억해야 한다.


※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중외일보, 조선신문, 부산일보 등에 보도된 맹휴 학생들의 처벌 명단은 신문마다 각각 차이가 있다.
※ 일본어 신문인 부산일보는 총독부 보도 검열의 제재를 덜 받아서 배신자의 명단과 맹휴 전말이 사실적으로 보도될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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